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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리즈는 Antonio Monestiroli(이하 AM)의 말년에 Federica Visconti(이하 FV), Renato Capozzi(이하 RC)와 있었던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 대담을 엮은 것입니다. 그들의 치열한 문답은 한 건축가의 개인적 건축철학에 대한 응변을 넘어 현대건축을 향한 날카로운 각성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RC:
피에르조르지오 오디프레디(Piergiorgio Odifreddi)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지식을 드넓은 대양의 섬에 비유를 했지요. 만약 지식이라는 것이 확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경계가 확장 될때 우리가 알지 못한 미지의 세계와 함께 확장 한다고 했지요.
또한 경계들이 포함시킬 수 있는 것들까지 확장합니다.
발레리(Vale'ry) 자신도 단언했지요.
"예술 작품은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다. 그것은 분석과 계산 그리고 치밀한 계획 작업이 핵심적(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비로소 도달하는 결과물이다." 라고 말입니다.
한 시인에 의해 정리된 정말 번뜩이는 정의인 것 같습니다!
조직적인 지식들에 대한 필요와 함께 새로운 영역으로의 약진을 위해
주체적으로 일생을 바친 알도 로시(Aldo Rossi),
그의 합리주의를 향한 열렬한 예찬론(esaltazione)이 있지요.
FV:
최근에 알도 로시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참 뜻 깊었던 특강을 하셨었지요?
2012년에 유형들에 대한.. 사람은 사람들이다...라는 주제로
AM:
바로 이 정의로부터 출발할 수 있겠네요. 이미 우리의 담론의 두 부분에서 활용되었었지요.
합리주의는 분석적입니다. 합리주의는 이성에 근거한 지식입니다.
논리적 정보들로 부터 출발하여 이후 유추를 시도하거나, 미지로의 전진을 이끌거나 그외에도 무수한 길로 나아갑니다.
예찬(esaltazione)이라는 말을 언어학적으로 보면 목적보어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에 대해 예찬하는가?', '무엇이 예찬 받아야 하는가?' 말입니다.
무슨 이론적인 것을 길게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실무적인 의미에서 저는 매번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마주하는 질문입니다.
매번 프로젝트 당시 '무엇이 내가 분명히 하려는 대상이 될 것인가?',
'즉 무엇을 예찬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임할 때마다 말이죠.
이러한 목표와 함께, 현재 작업하고 있는 대상의 조직적(분류학적, 계통적) 지식 기반 위에 프로젝트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알도 로시도 언급했듯 '개념의 중추'를 예찬(더 극적으로 강조하는)하는 작업이 필수적입니다.
이 예찬하는 작업 속에 -형태적인 예찬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가 있다는 걸 드러나도록 결정짓게 됩니다.
이것은 그것의 축척된 지식이 존재할 경우에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생각치 않고서야 '다른 하나' 없이 '하나'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알도 로시의 합리주의에 대한 예찬론이라는 제가 헌정했던 작은 책에서 언급했던 한 예를 다시 얘기하고 싶습니다.
멜빌의 '모비 딕(백경)'이라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고래학이죠.
그 안에 작가는 바다에 사는 모든 종의 고래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카탈로그처럼 분석하고 있죠.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19세기 중엽 이전의 시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이 시기에 과학은 분류체계를 광범위화 하던 실존주의적 과학이였죠.
멜빌은 이러한 시대의 큰 변화와 함께 하얀 고래라는 '유일함'과 함께 이 대선율을 탄생시켰습니다.
하얀 고래라는 착상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비-일반적인 것이죠.
우리는 그 고래를 하나의 특별히 '예찬된' 고래라 부를 수 있겠네요!
멜빌은 그 하얀 고래라는 유일함을 통해 자연의 신비함, 야수성, 우리가 그것을 진정으로 알기란 불가능함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하얀 고래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을 거라는 불가능함 말입니다.
알도 로시도 멜빌을 좋아했죠. 아마 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배의 선장과 비교되는 것을 좋아했고, 저는 상상하기와 분류하기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매우 좋아했지요.
이 관계 덕에 우리는 모든 고래를 알 수 있으며, '또 다른 하나'를 상상해 낼 수 있습니다.
카탈로그에는 존재 하지 않는 '또 다른 하나'를 상상할 수 있게 되지요.
우리가 쫓고 있는, 우리가 과연 달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또 다른 하나'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사/연구하다'와 '쫓다/사냥하다' 라는 두 말은 본질적으로 비슷해 보이네요.
발레리(Vale'ry)가 '적합한 단어'를 찾으러 간다고 말 했을 때처럼 말이죠.
저는 이러한 부분이 정말 흥미롭게 느낍니다.
그 다음은 상상하기의 역할 즉, 이 예찬을 구성하는 것 안에서 질문할 것에 대해 더 얘기 할 수 있겠습니다.
수년 전, 저는 저만의 사고하는 방식을 바꾼 계기가 있었습니다.
엔조 멜란드리(Enzo Melandri)의 유추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였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풀 때에 연역적 추리만으로는 더이상 사고의 전개가 불가능함을 이해하게 되었죠.
우리의 영역에서 임하고 있는 작업과 그 영역 외의 분야에서 우리가 보는 것, 이 둘 사이에
하나의 교각을 놓은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두 분야가 상당량 상호 무관한 분야라 하더라도 말이죠. 다른 분야의 무언가가
전혀 새로운 분야로의 유입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르 꼬르뷔제를 떠올려 보세요. 그는 마르세유만에 정박된 대형 여객선들을 보며,
현대 도시의 집이 그 선박들 사이의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유니떼다비따시옹(Unite d'Habituation,1947~1952)을 만들어 냈지요.
르 꼬르뷔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설명했지요. 집과 대형 여객선.
이 두 가지는 서로 관련이 있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선박이란 거대한 하나의 집에
공동 거주 할 큰 인구에 어울릴 크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형 여객선에는 필요한 서비스 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며, 한 선박에서 수평선에 있는
다른 선박들을 관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일한 각 선박들은 서로 각각 광활한 거리를 두고 위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꼬르뷔제는 왜 대형 여객선으로부터의 유추에 관심을 두는지를 이렇게 모두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담론의 두 번째 논의인 상상하기의 역할이란? 주제도 비로소 설명 가능합니다.
그것을 더욱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덜 추구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요.
신기한 것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알도 로시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 말로 설명하지 않지만
이후, 밤동안 <과학적 자서전> 을 써내죠. 그리고 그 안에 모든 것을 설명해 놓습니다.
우리의 이 두 번째 논의도 이성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의 방법론을 실행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단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이성적인 사고는
우리를 서로간 커뮤니케이션 가능하게 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는지 논의 할 수 있게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에 동의를 하는지 여부를 논의 할 수 있게끔 합니다.
프로젝트의 한 방법론을 설정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게끔 합니다.
저는 20년 전 <방법론(Questioni di metodo)> 라는 책을 썼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날 다시 토론을 진행하는 것을 싫어할 이유가 없죠.
왜냐하면 제 생각에 하나의 방법 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아직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축가 및 건축이론가와의 일대일 인터뷰를 모아만든 Clean scarl사의 SAPER CREDERE IN ARCHITETTURA 시리즈의 43번째 권 'trentatrè domande a Antonio MONESTIROLI'를 번역한 것입니다. 다소 오역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적사항 및 오역이 있을 경우, 누구든지 소중한 의견 남겨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추후 발견되는 오역은 계속해서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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