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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인터뷰] 공동체적 의무로서의 건축-A.Monestiroli 인터뷰(1)

건축 속으로/건축 이론

by Andrea. 2020. 4. 30.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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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인터뷰] 공동체적 의무로서의 건축(L’architettura come compito civile)-A.Monestiroli 인터뷰 (1)

*compito civile를 공동체적 의무로 의역했음을 밝힙니다.

건축가로의 행로

인터뷰를 시작하기 위해 먼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그 건축에 향한 열망은 어떻게 갖게 되었나요? 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의 아버지는 건설쪽에 종사하셨지요?

 

네. 제 아버지는 건설일을 하셨습니다. 1950년 대의 밀라노에는 건축가 루이지 모레티(Luigi Moretti)의 건물들 대부분이 들어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12살~13살 정도였는데 이 시기는 지금의 제가 있기 까지의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모레티는 자신의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 현장을 방문하고자 꼭 일요일 아침이면 로마로부터 밀라노에 오곤 했습니다. 현장에 작업자들이 없고 완전히 텅 비어있을 시간에 말입니다. 현장은 텅 비어 있었고, 그곳에 거대한 건설물은 지어지고 있었죠. 그 현장에 저는 완전 매료되었답니다. 

 

이 장소에 서서 저는 제 아버지와 모레티 사이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곤 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도 저를 굉장히 감동시켰지요. 그 중에서도 라짜베타 길의 호텔(Casa albergo di via Lazzaretto)의 건설과 그것에 대한 모레티의 설명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모레티는 자신의 프로젝트들의 모형들을 많이 만들어 보곤 했습니다. 건설 현장 사무실에는 늘 모형이 놓여져 있었고 저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답니다. 건설 현장은 제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었지요. 

Casa albergo di via Lazzaretto

또다른 흥미로운 것은 제 어머니와 관련한 것입니다. 제 어머니는 상상 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의 장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것의 중요함을 저는 뒤늦게야 깨달았답니다. 제 어머니는 한 성악 그룹의 일원이였습니다. 그들의 실력은 매우 출중했습니다. 앞서 말한 나이였던 시기의 저는 어머니와 함께 스칼라 극장의 무대 뒷공간을 따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무대의 뒤에서 극장의 모든 기계장치들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그것들은 굉장히 믿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장치들이 작동하며 무대 배경이 설치되고 해체되었지요. 저는 뒤에서 배우들의 옷을 입는 것을 돕거나 하며 있었죠.

 

이 두 개의 어린 시절의 이미지, 건설현장의 이미지와 극장의 이미지는 마지막에는 두개가 혼합되어 제 기억 속에 강력하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건축에서 건물이 지어지는 모습과 무대의 배경 장치들과 그것이 표상하는 것들은 늘 동시에 제 안에 함께 하고 있었지요. 학생들에게 저는 늘 이 두 가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강조한답니다.

 

그 다음, 어떻게 건축학과에 등록하게 되었나요?   

저는 아버지와 몇 달간의 긴 토론 후에야 건축학과에 등록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브레라(Brera) 대학의 무대디자인학과를 가고 싶었습니다. 극장이란 것에 매우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러나 제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보다시피 이 두 세계는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긴 토론의 시간 후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건축을 통해서 무대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의 졸업을 통해 극장에 몰입할 수도 있고 다른 것에도 몰두 할 수 있었지요. 제 아버지는 제가 결국 건축에 푹 빠질 것이고 더이상 극장에 대해 생각치 않을 거란 사실을 매우 잘 알고 계셨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지요. 

 

텐덴짜의 태동과 건축철학

당신은 1965년에 프랑코 알비니(Franco Albini)와 밀라노에서 졸업을 했지요. 당신은 알도 로시(Aldo Rossi)의 조수였고요. 그 이후에 교육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페스카라(Pescara)에서도 잠시 가르쳤었고요. 당시 그 졸업한지 얼마 안된 젊은 교수이자 건축가들에 대해 좀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또한 그 당시의 학교에서 이루어지던 건축 교육에 대해서도 좀 알려주시지요.

 

저는 1959년 부터 1965년 까지 밀라노공대의 건축학과를 다녔는데요. 그 시기에 밀라노 공대는 학구열이 뜨거운 학교는 아니였습니다. 교수들은 직업적인 것과 연결되었는데 그들은 세계 대전 이후의 회복, 재건이라는 당시의 과제가 아닌 50년대 말의 건물에 대한 탐구에 더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몇몇의 특별한 선생님들이 있었지요. 이들은 제게 있어서 진정한 교육자들이자 건축가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제게 학교의 필요성(오늘날까지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학교의 필요성만이 아닌 '선생님의 필요성'이 매우 중요하단 것을요. 저는 모든 건축과 학생들에게 그들의 성장하는 시기동안 자신들의 선생님을 만나길 늘 바랩니다. 그 선생님은 그들과 동시대에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시대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Franco Albini

이 시기에 선생님들 중 한 분은 프랑코 알비니였습니다. 좀 특별한 인물인데요 그는 늘 탁상의 이론들 보다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가르쳐었습니다. 다른 한 선생님은 에르네스토 로저스(Ernesto Rogers)였습니다. 제가 알비니 지도하에 졸업을 하고 난 후 로저스는 제게 알도 로시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로시는 베네치아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건축에 대한 개념에 감명받았습니다. 

 

담배를 문 Ernesto Rogers

건축의 이론적 어려움에 당면해 있던 시기였는데 로시는 '건축 자체'와 '공동체적(도시의 건축) 임무(impegno civile)'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이 주제들이 기반이 되고 그 위에 저와 제 세대의 건축그룹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학업적으로 흔들렸던 시기, 정치적으로 혼란 했던 상황, 대학에 몰두 했던 시기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희들 중 몇몇의 똑똑한 이들은, 정치를 문화로부터 구분하여 생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문화라는 것은 이미 해결된 정치적인 것들이 건축가의 작업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건축 이론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는 기본 바탕이 됩니다. 로시는 자신이 이끄는 그룹을 텐덴짜(la Tendenza)라고 불렀습니다. 아마 우리들의 생각을 그런 틀 안에서 생각하거나, 꼭 그래야만 하길 바랬던 마음을 분명히 하고자 그렇게 명명했던 것 같습니다.

 

Aldo Rossi

시는 이 시기에 계몽주의를 연구중에 있었습니다. 공동체적 의무로서의 건축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던 계몽주의 말입니다. 계몽주의 건축가들에게는 오직 '공동체적 의무로부터 발현되는 건축만'이 '형태들에 대한 연구'가 의의를 갖게 했습니다. 그런 건축(서비스적 의무로서의 건축에 대조적인)에 대한 요구로써, 혹은 도시의 건설을 위한 요구에 대한 과학 기술적(테크노크라시적) 해결책으로서의 건축을 지향하고자 했던 점이 그 당시 저희 세대 건축 그룹들의 건축 연구의 출발점이였습니다.

 

그러한 계기는 저와 조르지오 그라시(Giorgio Grassi)에게도 마찬가지였으며,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있던 건축가 -나폴리의 아고스티노 렌나(Agostino Renna), 살바토레 비소니(Salvatore Bisogni), 그외 베니스의 몇명의 건축가들 등- 들이 공유하고 있던 점입니다.

 

Tendenza 일원

페스카라(Pescara) 대학교는 정말 성공적인 경험이였습니다. 당시 매우 젊었던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다같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페스카라 대학은 오로지 만들어야 할 것들과 발명해야 할 것들로 가득찬 보물창고 같은 곳이였지요. 그 대학은 1968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열성적인 논의들 보여준 분위기 속에서 한 기술위원회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한 젊은 건축 교수들 그룹에 전권 위임되었지요. 기술위원회는 나폴리 사람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알도 로시, 그라시, 아고스티노 렌나 등의 교수진이였죠.

 

이 젊은 교수진 그룹은 이 새 대학교에서 결성되게 되었죠. 거기서 그런 분위기 속에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공고히 해 나갔습니다. 당시의 아브루쪼(Abruzzo 주)주는 새로운 현대의 도시의 탄생을 꿈꿀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페스카라에서 우리들은 초년의 강의들을 시작했고, 우리들의 초창기 프로젝트들이 탄생되었으며, 그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건축'과 '공동체적 의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실험과 탐구를 해나갔습니다.

그런 상황은 몇 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후 우리 각자는 자신의 도시로 각기 돌아갔습니다. 이 그룹은 이탈리아 여러 대학들로 흩어졌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들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축을 공동체적 의무로서 이해하는 건축 그룹들에 대한 지도를 그려본다면 그들은 한 줄기를 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costruire laterizio" Luglio/Agosto 2009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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