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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대담] 안토니오 모네스티롤리에게 묻는 33가지 질문-2,3,4번째

건축 속으로/건축 이론

by Andrea. 2020. 1. 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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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24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Antonio Monestiroli(이하 AM)의 말년에 Federica Visconti(이하 FV), Renato Capozzi(이하 RC)와 있었던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 대담을 엮은 것입니다. 그들의 치열한 문답은 한 건축가의 개인적 건축철학에 대한 응변을 넘어 현대건축을 향한 날카로운 각성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RC: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아 보입니다. 이 공예(mestiere. 영어의 craft의 뜻에 가깝다, 혹은 expertise)라는 것이 정확히 견고한 이론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 ‘적용(pratica. 혹은 실천)의 문제’ 라는 것입니다. 이론적 토대는 그 시작점에 있든, 끝 점에 있든지 실행(il fare)의 원리들을 규명합니다. 그런데 실행이라는 것은 경험화 되는 과정을 통해 그 자체로 원리들을 고쳐나가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희의 질문이 당신이 앞서 말했던 교육의 문제 내지 건축의 전달 가능성에 대한 문제와 직결되는군요. 제 생각에는 건축이 계속해서 타율적인 것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유일한 가능성만이 있어 보입니다

 

건축은 건설의 문제, 형태의 문제 및 고유의 배열을 가졌다는 문제 -앞서 Cassiari가 말했던- 를 넘어서 몇가지 결정된 양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전달 가능하다'라는 건축의 본질적 성격이 ‘왜 이러한 형태들인지, 왜 이러한 형태들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와 같은 물음으로 회귀되는 양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육적 차원의 아주 중요한 전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형태를 개념화 해야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인정 없이 무언가를 가를 칠 수 있다는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FV: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바로 우리가 프로젝트하는 형태들에 ‘논리/근거를 부여(dare ragione)’

할 수 있다는 필요성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Gòmez Dàvila는 ‘현대의 예술은 그 예술을 지탱하는 이론적 비평과 같은 지지대 없이도 개념화할 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의 큰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에 기초하는지 여부에 따라 선택이 논리적 근거를 갖추게 할 수 있는지’ 라는 점, 다른 하나는 ‘예술(혹은 건축)의 개념화’ 에 대한 점입니다. 이 ‘개념화’라는 것은 ‘비평’이라는 제 3의 요소에 대한 언급을 필연적으로 만들며, ‘비평’이 작품이 종속되어야 할지 사라져야 할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되게 합니다. 

RC: 

이 점에 덧붙여, ‘건축 구성(Composizione architettonica)’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야 한다면 저는 ‘그것은 건축에 대한 논쟁 주제 중 가장 과학적 영역에 대한 부분이다’ 라고 정확히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질서에 따라 형태들이 왜 하나의 총체를 구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논리를 부여할 수 있고, 설명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과정 중에, 질서 안에서로부터 통사론적 시스템과 규칙 등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시 건축의 예술/과학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AM:

말했듯이, 건축은 두말 할 것 없이 공예입니다. 그리고 공예는 특정한 방법을 가지고 할 수도 있고, 없이 할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과학적 부류에 걸쳐 나타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오늘날 통합주의자(integralista)가 거의 없습니다. 말인 즉, 형태들의 건설 과정이나 건축의 구성에 있어서,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분석된 전형에 대한 사실 이해, 도구에 대한 지식, 주변 맥락들에 대한 이해, 참조들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만약 무엇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 이전에는 어떻게 해왔었는지를 실질적으로 가서 확인해야만 한다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객관성' 을 포함하고 있는 이 전형들 내부로는 건축은 우리에게 '주관적 성격을 가진 선택들'을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두 가지 측면('객관성'과 '주관적 성격을 가진 선택들') 사이에 어떤 관계 및 어떤 변증법적 논리를 가지는지 이해(이해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것)가 필요합니다. 어디까지 자전적 기록(역사)들이 형태들에 대한 과학을 규제할 수 있는지, 반면 과학은 어디까지 분석적 이해를 수용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인식론을 연구하는 자들 쓰는 용어로 이 두 가지 요소('객관성'과 '주관적 성격을 가진 선택들')를 첫 번째 것은 연역적(deduttiva), 두 번째 것은 귀납적(induttiva)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Gallaratese 지역의 교회안,1989, A.Monestiroli

과학은 연역화, 귀납화 방법 둘 모두를 활용합니다.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건축을 온전히 연역적인 과정이라 인정해버린다면 자! 필시 건축은 미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온전히 귀납적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확신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의 지식적 총계로서 견고한 기반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축가가 자신의 상상력과 자신의 주관적 생각의 근간으로 삼을 질료의 집합 세계입니다.

 

건축이란 것은 구체화(형태화) 되어야 하는 원료에 대해 깊은 탐구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프로젝트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당연히 상상력이란 것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논의들은 명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본다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요.

 

한 측면에 건축가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박물관을 설계할 때 하나의 형태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간혹 그들은 그 형태가 어디서 유래됐는지 조차 모릅니다. 아니면 안다 하더라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박물관에 적용합니다. 다른 측면에 또다른 건축가 집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박물관을 설계할 때 역사 속의 모든 박물관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환원의 과정을 거친 후에 그들의 박물관을 추론해냅니다. 

 

저는 두 종류의 길을 말하고 있는데요. 만약 두 길이 나눠진 채로 남는다면 영원히 출구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이 두길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해야 할 것입니다. 즉, 연역법에서 귀납법으로 진행되는 작업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언제나 상상력에게 있어 구체적이고, 엄숙한 양식(糧食)과 본연의 바탕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논의들과 함께 완벽한 질서 속에 놓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건축이라는 ‘과학’ 은 용어에서 이미 충분한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당신들을 기다리면서 3가지의 건축에 대한 정의를 곱씹어 보았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비트루비우스의 정의를 보도록 합시다. 저는 이 정의에는 별다른 추가할 사항이 없다고 믿습니다. 불레(Boullée)가 ‘원인과 결과가 도치되었다는 오류’ 를 지적하며 비트루비우스의 정의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전례(典例)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비트루비우스 이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예술은 -물론 건축에도 가치를 지니는-손을 필요로 하는 과학이다’ 라고 선언했지요. 그에게 예술이란 세계에 대한 이해(앎)였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일반적으로 예술을 정의하는 가장 훌륭한 정의인 듯 합니다. 물론 건축의 정의로도 말이죠. 필히 예술-회화, 조각, 건축, 음악-은 손을 통해 행해집니다. 이해(앎)를 위한 방법이 부제하다면 우리의 손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제가 주로 인용하길 좋아하는 세 번째 정의는 폴 발레리(Paul Valèry)의 정의입니다. 표면상 모순처럼 보여질 수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아주 훌륭한 정의입니다. 그는 ‘시학은 적합함의 과학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미학책에서 아주 명확하게 그것을 얘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시에서 단어들의 선택은 길고도 어려운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그 시의 알맞은 지점에 ‘적합한’ 단어를 택해야만 하는 것이죠. 이 작업은 우리가 건축에서 하는 작업과 완전히 유사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이 정의를 좋아합니다.

 

또한, 쥐아누고 폴레젤로(Gianugo Polesello)가 건축에서도 ‘적합함의 과학’ 이라 말할 수 있다고 언급한 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미스(Mies)의 건축에 대한 정의도 생각이 납니다. 그의 정의 또한 ‘적합함(esattezza)’에 근거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든 논의는 레오나르도이건, 폴 발레리이건, 비트루비우스 간에 하나로 귀결됩니다. 시를 쓰는 자의 혹은 그림을 그리는 자의 주관적인 이 구성요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좀 더 진행된 다른 방향으로의 논의를 진행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축에서 타부시되는 것들에 대해 말해 볼 수 있겠네요. 우리는 건축작업(mestiere)을 하면서 실수를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수에 대한 위험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작업물에 대한 잣대를 타인들이 가질 수 있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들이 지은 건축들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의미를 인식가능한 수준까지 -필수적인-표현적 질을 갖추었는지를 결정할 가능성 또한 타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이 경우에만 우리는 작품을 해내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품에 부여하는 의미가 인지되지 않는 한, 우리는 작품은 해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위험성을 무릅쓰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실패를 의미합니다. 혹은 의미없는, 생명없는 형태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축에서 위험을 무릅쓰길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필연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반복해야 합니다. 또한 아직 위험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을 만들고자 한다면 분명 옳지 않은 것을 만든다는 것이 됩니다.


※연두색 글씨는 정확히 어떻게 바꿔야할지 고민 중입니다. 많은 의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건축가 및 건축이론가와의 일대일 인터뷰를 모아만든 Clean scarl사의 SAPER CREDERE IN ARCHITETTURA 시리즈의 43번째 권 'trentatrè domande a Antonio MONESTIROLI'를 번역한 것입니다. 다소 오역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적사항 및 오역이 있을 경우, 누구든지 소중한 의견 남겨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추후 발견되는 오역은 계속해서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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